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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

01주신언

  • 자(字)인지
  • 호(號)송재
  • 본관(本寬)신안

모당손공이 지은 서낙제의 행장에 이르기를 주신언 인지, 채선각 임중은 강학을 거두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투암 채공이 서낙재의 행록에 이르기를 벗들에 대하여 논하기를 주인지, 채임중, 손기도, 정자회 여러분은 서로 추중하면서 공을 맹주로 삼았다고 하였이니, 오직 이 두 문구로써 족히 그 평생의 사행을 살펴볼 수 있다. 유행, 덕행으로 달성십현에 소재되어 있다.

02채응린

  • 자(字)군서
  • 호(號)송담
  • 본관(本寬)인천

1955년 (명종 10년)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을사사화 이후로 몸을 숨기고 과거에 응시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위기지학에 뜻을 두어 육경의 심오한 뜻과 중국 송대 여러 성현의 성리훈을 깊이 연구하였다. 선생은 도산을 찾아 학봉 김성일, 월천 조목 양 선생과도 월여 강론하고, 매암 이숙량과도 교류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는데, 시문에도 탁월한 정감을 나타내어 후학들이 시문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만년에는 압로정에서 후진양성과 빈궁한 자에게 많은 구재활동을 하여 덕행으로 달성십현록에 등재되었다. 사림에서 건의하여 유림들이 선생을 추모하는 위패를 모시고 유호서원, 서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은 『송담선생 實記』4권 1책이 있다.

03정사철

  • 자(字)계명
  • 호(號)임하
  • 본관(本寬)동래

1554년(명종 9년) 팔거현, 사수 집에 있을 때 하빈 하남(현 다사읍 매곡리) 연화재를 신축하여, 채송담 응린, 서연정 형, 전계동 경창, 도우윤 원결, 권송재 응인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였다. 1559년(명종 14년) 선생 나이 30세 때 종질 정행정 여강을 가르치고 이때부터 후학교육에 심려를 기울였다.

1563년(선조 18년) 송신연 사이, 이산남 순, 주송재 신언등에게 심경을 강론하였으며, 1570년 (선조3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87년(선조 20년) 도우윤 선생과 함께 선사서사를 창건하여 강학소로 개설하였다. 임진왜란 시에 팔공산회맹에 의병장으로 관군을 지원하였다.

선생은 덕행, 효행, 교화로 달성십현에 추앙되고, 사림에서 건의하여 선생을 추모하는 위패를 모시오 금암서원에 봉향되었으며, 부자가 임진호국 영남충의단에 제향되었다. 문하생은 70여 명이며 저서는 『관혼도설』, 『거가잡의』가 있고 문집은『임하실기』3권 1책이 있다.

04곽재겸

  • 자(字)익보
  • 호(號)괴헌
  • 본관(本寬)현풍

유일로써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유호서원에 제향하고 있다. 1585년(선조 18년) 김동강 선생의 천거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초유사 학봉 김성일선생을 찾아가 모병과 군량 수집 등에 많은 방책을 제시하고 서낙재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누차 전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을 이끌고 화왕산성(창녕에 있음)에 가서 종숙 준과 사촌 아우 재우와 함께 적을 방어하고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난이 끝난 뒤 후진 양성에 힘썼다. 저서는 『훈자육대도』1책과 『괴헌집』3권 1책 등이 있으며, 임진호국 영남충의단에서 제향하고 있다.

05서사원

  • 자(字)행보
  • 호(號)낙재
  • 본관(本寬)달성

1572년(선조 5년) 오산에서 여름 50일 동안 산사등에서 고문, 고시 및 당송의 시를 공부하고 시부를 짓는 수업에 참여하였다. 그 후에는 정한강, 김동강선생의 사우이다. 주자학(송나라의 대학자 주희의 학설)과 퇴계 이황 선생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에는 후진양성에 힘썼다.

1575년(선조 8년)에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개연히 구도의 뜻을 가졌다. 1584년(선조 17년)에 예조의 추천으로 몽학교수에 제수되었고, 1587년(선조 20년)에 학행으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 되었으나 얼마 아니 되어 사임하였다.

1595년(선조 28년)에 청안현감에 부임하여 3년간 선정을 베풀었으며, 그 후 17년간 개령, 옥과, 연기의 현감, 형조, 호조의 정랑, 역학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아니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공산성에서 창의하여 의병대장이 되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산 회맹에 참가하였다. 평생 교화로 정사학규를 만들어 학도들에게 학문을 연마하는 방법과 몸을 닦는 규범을 제정하여 평생 실행할 수 있도록 강학하였는데, 180명의 문하생이 있다. 대구의 이강서원, 청안의 구계서원, 임란호국 영남충의단 등에서 제향하고 있다. 문집은『낙재집』7권, 일기, 연보 등 6책이 있다.

06채선각

  • 자(字)임중
  • 호(號)동호
  • 본관(本寬)인천

공은 성품은 호련에 비유할 만큼 출중한 기량의 인물이었으나 하늘이 넉넉히 수명을 빌려주지 아니하여 가슴 속에 쌓은 경륜을 펼칠 수 없었다. 1592년(선조 25년) 부친 선교랑이 임란 시에 팔공산으로 정임하선생의 의병진에 들어갔을 때 부친을 배종하여 여러가지 군사상의 묘책을 계획한 것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달성과 대구의 제현들이 공을 평가하기를 "학업에 힘쓰고 행동이 독실하였으며, 처신과 행실을 한결같이 예절에 맞게 행하였다."고 하였다. 달부 후학들은 공의 학문과 덕행을 존숭하였으니 달성유현록에 실려있다.

07정광천

  • 자(字)자회
  • 호(號)낙애 또는송파
  • 본관(本寬)동래

공은 효심이 지극하여 무릇 어른을 모시는 데 전전긍긍하기를 무형물도 보는 듯 무성도 듣는 듯하였다. 효행이 두터워 중국 증삼과 민자건의 효행과 같다고 한 세인의 칭송이 『대구 달성지』에 소재되어 있다. 임란때 아버지와 공산호맹에 참가 관군을 도왔고, 화왕산성을 지키는 데 공이 있었다.

공은 금암서원에 임하선생과 같이 배향되었으며, 창의, 학행, 효행이 추중하여 달성유현록에 등재되어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었다.저서로는 『낙애집』3권 1책, 『용사일록』1책, 고시조 술회가 어문 9수는 국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08손처눌

  • 자(字)기도
  • 호(號)모당
  • 본관(本寬)일직

1583년(선조 16년)에 여헌 장현광 선생과 함께 경학을 강론했다. 1592년(선조 25년) 왜란이 일어남에 아우 오매정 처약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장에 추대되어 팔조령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정모호란 때에는 칠십이 넘은 고령임에도 의병장이 되어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다. 임란 중에 연이어 상을 당하여 그 예를 다하지 못했다 하여 묘소 앞에 집을 지어 이곳에서 종신토록 시묘살이 하는 뜻으로 영모당이라하여 편액을 하였는데, 제자들이 이를 호로 삼아 모당이라 하였다.

전쟁으로 학교가 황폐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고을 사람들을 창솔하여 먼저 학교를 건립하고 백록동규와 함께 『심경』과 『근사록』등을 강론하였다. 매월 삭망에 여러 유생과 더불어 연경서원 선사재에 모이고 분암, 동학암에서 경전의 뜻을 강론하였다. 학령 20조를 지어 좌우에 걸어 두고 매일 아침에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강당에 나와 앉아 여러 생도들이 들어와 절하여 상읍례를 행하는 규범으로 후학들의 평생 교화사업에 일념하였다.

선생이 별세한 지 10여 년 뒤에 사림에서 건의하여, 청호서원에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여 지금까지 존모하고 있다. 선생께서는 의병장으로 나라에 충을 다하고 후학교화에 전력을 다해 『달성지』에 유행 덕행으로 달성십현에 소재되어 있다. 48세 되던 1600년(선조 33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77세 되던 1629년(인조 7년)까지 30년 동안 지속하였는데, 현재 7책이 전하고 있으며 『통강제자록』에 문하생 202명이 올라 있다. 문집은 『모당집』9권 3책, 일기 7책, 『통강록』1책이 있다.

09채몽연

  • 자(字)정응
  • 호(號)투암
  • 본관(本寬)인천

『달성덕행록』에는 정한강 선생을 사사하여 스승을 높이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며 인동의 소암서원에 제향하고 있다. 1593년(선조 26년) 모친상을 당하고 얼마 안 되어 외조모 상을 당하였는데 당시 병란중이라 매우 어려운 지경인데도 법도에 맞게 무사히 장례를 마쳤고, 선대 십세의 묘비를 세우는 등 효성이 지극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서낙재 선생과 더불어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부장으로 활동했고, 정유재란때에는 화앙산성에 들어가 『동고록』에 등재되는 등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

선사 한강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신도비문을 상촌 신흠선생께서 찬해달라는 서신을 가지고 윤자 백포선생을 여러 번 상경시켜 예를 다하였다. 빈곤한 자를 구휼하여 『달성지』에 기록되어 있으며, 효성으로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임진호국 영남충의단에 제향하고 있다. 저서는 『토암집』7권 2책이 있다.

10류시번

  • 자(字)위중
  • 호(號)사월당
  • 본관(本寬)문화

공은 임진왜란 때 연정공이 당시 의병장으로서 항상 의병소에 있었는데 날마다 문안드리고 난중에도 자당을 모시고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1615년(광해군 7년)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었으며, 이후로는 주자서와 『퇴계언행록』등의 책을 궁리 탐독하였으며, 이석담 윤우, 채투암 몽연과 더불어 경지를 받아듣지 못한 바를 더욱 들어 익혔다. 정양계 효인, 정지평 승명, 양상사 경사와 학문 연구에 전진하였다.

손모당 선생과 함께 후진 교육에 부지런히 힘썼으며 만년에는 사월호 근처에 집을 짓고 자호를 사월당이라 했다. 평생 덕행과 후진교육 실천으로 달성십현으로 추앙받았으며, 청호서원에 배향하고 있는 유학자이다. 문집에 『사월당집』2권 1책이 있다.

11도성유

  • 자(字)정언
  • 호(號)양직당
  • 본관(本寬)팔거

어릴 때 권송계에게 배우고 정한강, 서낙재 양문에 수학하여 덕행과 문장으로 세간의 사표와 서재문운의 개조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서사원의 창의진에 참여하였으나 당년에 외간상을 당하였다. 임란 후 잦은 국내외 전란, 정치적인 당쟁심화와 과제문란 및 광해군 패륜이 유학의 인의명분에 맞지 않으므로 강학을 위주로 경명행수함으로써 은일지사로 일관했으니, 그때의 심경이 『대동풍아』에 실려 있다. 일찍이 성리학의 제설을 섭렵하여 『성리정학』을 편찬하고 『오경체용분합지도』를 지어 조목마다 주해하였다.

1615년(광해 7년) 이강서재에서 낙재 선생의 별세로 공이 제장이 되어 여러 선비의 긍식이 되었다. 투암 채몽연과 낙재 선생의 행장을 찬하고 두 선생이 졸함에 공이 있었던 와룡정사가 향내 이학의 중심이 되었다. 제현의 이력을 밝혀 『달성일통연원』을 저작하는 일에도 앞서고, 칠곡문묘를 세움에 세전지를 흔쾌히 희사하여 오늘의 칠곡향교를 이루었다. 예서를 잘 써서 이강 을 비롯한 당시 교원의 신판은 대개공의 수서이며, 명현 거유들과 교의 함에 『대구읍지』에 향과 선생과 유행, 덕행으로 달성십현으로 추앙되며, 용호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은 『양직당집』3권 1책으로 서문은 판서 이원조가 썼다.

12박수춘

  • 자(字)경로
  • 호(號)국담
  • 본관(本寬)밀양

선생은 정한강 선생의 문인이며 장여헌에게 사숙하여 유명과 행의로 일세를 풍미한 유학자이다. 1592년(선조 25년) 초격 창의하여 2월 21일 당교저튜에 참전하였다. 1596년(선조 29년) 팔공산 회맹에 참가하여 9월에 창녕 화왕산성을 수성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아 북상 중 삼전도에서 화의가 이루어져 회군하면서, 맹서한 시 1수 <사회제벽>에 당시 공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1672년(현종 13년)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1691년(숙종 17년) 공의 효행이 유림에서 추앙을 받았다. 영남유림에서 선생은 충효근천하고 덕행순수하여 학문굉박과 문장영화는 실가사표 백세라 하여 달성십현으로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다. 1694년(숙종 20년) 청도 각북면 남산리 남강서원에 봉향되었다. 저서는 『국담집』3권 1책과 『독서지남』, 『학문유해』, 『도통원류록』, 『동방학문연원록』, 『의예문견해』가 있다.

13정수

  • 자(字)평보
  • 호(號)양졸재
  • 본관(本寬)동래

선생은 1590년(선조 23년) 관례 때 서낙재 선생이 자를 지어 주었다. 공은 정한강 선생이 거처하는 백매원과 매우 가까운 신당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그 문하에서 성리학의 진리를 터득하였다.

1593년(선조 26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별도의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아니하고 효심이 극진하다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타고난 모습이 단정하고 근엄하며 뜻과 행신이 맑아 집안 사람들이 공의 허술하거나 헝클어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며, 재물에 대하여는 초연하여 스스로 청렴 담백함을 지켜나갔다. 『달성지』에 "일찍이 스승을 모시고 삼가고 경계하여 스스로의 품위를 지켰다."고 했으며, 오양서원에 제향하고 있다. 문집에 『양졸재 실개』3권 1책이 있다.

14도여유

  • 자(字)해중
  • 호(號)서재
  • 본관(本寬)팔거

어릴 때 권송재에게 배우고, 정한강, 서낙재, 양문에서 사사받고 28세에 금호선사 선유에 참여하니 학문이 순정하여 세인이 추중하였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에 본부 수령 한명훈과 창의를 동모하였다. 1629년(인조 7년)에 의소 10조의 소안을 작성하였다.

무공량이었으며, 아들 복이 좋아 신수는 문과 부사, 신여는 문과 사예, 신행은 진사, 신징은 정량으로 과시와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이로써 마을 이름이 공의 호를 따서 서재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종형 양직당과 함께 서재의 문한을 떨쳐 달성십현으로 추앙되었으며, 대구읍지에 소재되고 용호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은 『서재집』4권 2책이 있고, 서문을 판서 이희발이 찬하였다.

15서시립

  • 자(字)입지
  • 호(號)전귀당
  • 본관(本寬)달성

선생은 효행, 덕행, 구호사업, 산업장려로 『달성 문인록』에 유현으로 소재되어 있다. 전란으로 공부할 기회를 놓쳤다가 개연히 분발하여 종장인 낙재와 정한강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였다. 어릴 때부터 성행이 순량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조부모와 부모는 물론 제부(아버지의 형제들)까지 극진히 모시니 이웃이 모두 효성에 감복했고 비범하게 생각했다. 또한, 이웃에 때마침 창궐한 전염병으로 부모와 부부자녀가 함께 죽은 자가 있어, 이들의 상장을 치루어 주는 등 이웃에 어려운 일이 있으며 직접 도와주었다.

이와 같은 구휼 행위를 순사 이경증이 알고 조정에 진휼(흉년에 기민을 구호하는 일)사업을 처리하여 줄 것을 청함에 이때가 1638년(인조 16년) 무인 대흉년으로 공이 도사 삼대부와 함께 기민 구휼에 크게 기여하였다. 효행으로써 참봉에 두 번이나 제수되었고 좌랑을 증직받았는데 사림에서 공의 덕행, 효행, 유행의 교화에 크게 감화되어 백원서원에 위패를 모시고 존모하였다. 저서에 『전귀당집』2권 2책이 있다.

16서사

  • 자(字)정보
  • 호(號)동고
  • 본관(本寬)달성

선생은 160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고향에서 의거를 준비하였으나 난이 평정됨에 그만두었다. 1636년(인조 14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예빈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정한강 선생이 공에게 "학문이 아름다운 영재"라고 장려하고, 장여헌 선생은 "기상은 참으로 유가의 선비답다."고 하였으며 사문이 도의로써 추중하였다. 재주와 행실로써 추천되어 참봉에 제수되었고 옥천사에 제향하고 있다. 저서에 『동고집』6권 3책이 있다.

17박종우

  • 자(字)군석
  • 호(號)도곡
  • 본관(本寬)순천

선생은 1610년(광해 2년)에 한강 선생이 모함을 받아 명사들이 한꺼번에 연루될 우려가 있으므로 동지들과 함께 조정에 호소하여 신구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있을 때 공은 50일간 점석거처하며 관찰사 심연에게 근왕병을 일으키도록 권하여 충군애국의 의를 다했다. 또한 삼전도의 굴욕적인 강화협정의 소식을 듣고 북향하여 통곡하고 평생의 문적을 모두 불사르고 숭정처사라 자칭하며 19년을 두문자숙하였다.

선생은 자품(타고난 천성)이 높고 응중(바르고 묵직함)하며 순박하여 발휘함이 과단하며 뜻을 세우고 실행함이 과감하였다. 『읍지』에는 "문장과 행의가 세상의 추중하는바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지평을 증직받은 유학자이다. 저서는 『병자록』1책과 『도곡집』7권 3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