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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배

  • 날뫼북춤의 예능보유자 제 1호 김수배 이미지
  • 날뫼북춤의 예능보유자 제 1호 김수배 이미지
  • (1927~2006)

    김수배

    • 날뫼북춤의 예능보유자 제1호
      김수배는 비산농악뿐 아니라 비산농악을 모체로 하는 비산동 천왕메기와 날뫼북춤을 개발하여 오늘까지 존속하도록 하였다.

김수배(1927~2006)

김수배는 1927년 7월 25일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리동에서 평범한 농부의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김현주이며, 모친은 충주 석씨 가문으로 이름은 두내이다. 김수배의 고향은 대구광역시와 청도군의 경계지점인 비슬산 아래의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김수배가 열아홉 살이 되던 1945년 12월 28일, 그의 가족은 고향 청도의 시골 마을을 떠나서 대도시인 대구로 이사하여 달성공원 옆 비산동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김수배는 이 동네 농악대인 비산농악대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당시 비산동의 농악대에는 키가 훤칠하고 인물이 출중한 분이 북을 쳤는데 그 분이 바로 김수배의 북 선생이었던 임문구였다. 6·25전쟁 후 임문구와 김수배는 해체된 농악을 재건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김수배는 남아있는 풍물꾼들과 함께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하여 1953년 10월 20일 저녁 비산농악단을 재창단하는 첫 모임을 임문구의 집에서 가졌다. 모인 사람들은 스무 명 정도였으며, 계의 명칭은 종전의 이름대로 대구 비산농악으로 정하였다.

당시 비산농악대는 주로 마산, 진주, 진해, 청도, 대구 등지에서 벌어지는 소싸움대회에 초청되어 삼사일 간 풍물을 쳤다. 대구에서는 시장마다 비산농악대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시장 곳곳에서 지신밟기를 하였다. 시장 개장식 때 비산농악은 장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지신을 정성껏 밟아 주었다. 시장에서 걸립을 할 경우 기간은 대체로 4,5일 정도 걸렸으며 시장의 상인으로부터 적지 않는 돈이 거출되기도 하였다.

비산농악대는 재창단된 이후 몇 년 동안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걸립농악을 지속해왔다. 단원들은 한 달이나 두 달을 지나서 집에 돌아오기도 하고, 무당이나 화랭이패들처럼 전국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1960년대에 들어와서 농악경연대회가 전국 곳곳에서 개최되었다. 1958년 10월 비산농악대는 경주에서 개최된 영남농악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우승을 하였다. 1962년 9월에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단체상을 받았으며, 1967년 7월 울산공업단지축제에 참가하여 특상을 받았다. 1970년 10월에는 서울에서 개최된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비산농악대는 각종 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김수배는 비산농악뿐 아니라 비산농악을 모체로 하는 비산동 천왕메기와 날뫼북춤을 개발하여 오늘까지 존속하도록 하였다. 그가 한평생 살아오는 동안 비산농악은 생의 반려자였고 자식이었다. 비산농악은 김수배의 마음에 선명한 부조처럼 각인되었으며 그를 온통 사로잡는 그 무엇이었다. 김수배는 세인들의 무관심과 그를 향한 멸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인들의 삶이 그러하듯 김수배 역시 한평생 풍물의 흥에 흠뻑 취해 살아왔다. 그 결과 하마터면 우리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하였던 비산농악을 그는 이만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그 맥을 이어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