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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유

11도성유
자(字)
정언
호(號)
양직당
본관(本貫)
팔거
어릴 때 권송계에게 배우고 정한강, 서낙재 양문에 수학하여 덕행과 문장으로 세간의 사표와 서재문운의 개조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서사원의 창의진에 참여하였으나 당년에 외간상을 당하였다. 임란 후 잦은 국내외 전란, 정치적인 당쟁심화와 과제문란 및 광해군 패륜이 유학의 인의명분에 맞지 않으므로 강학을 위주로 경명행수함으로써 은일지사로 일관했으니, 그때의 심경이 『대동풍아』에 실려 있다.
일찍이 성리학의 제설을 섭렵하여 『성리정학』을 편찬하고 『오경체용분합지도』를 지어 조목마다 주해하였다.
1615년(광해 7년) 이강서재에서 낙재 선생의 별세로 공이 제장이 되어 여러 선비의 긍식이 되었다. 투암 채몽연과 낙재 선생의 행장을 찬하고 두 선생이 졸함에 공이 있었던 와룡정사가 향내 이학의 중심이 되었다.
제현의 이력을 밝혀 『달성일통연원』을 저작하는 일에도 앞서고, 칠곡문묘를 세움에 세전지를 흔쾌히 희사하여 오늘의 칠곡향교를 이루었다. 예서를 잘 써서 이강 을 비롯한 당시 교원의 신판은 대개공의 수서이며, 명현 거유들과 교의 함에 『대구읍지』에 향과 선생과 유행, 덕행으로 달성십현으로 추앙되며, 용호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은 『양직당집』3권 1책으로 서문은 판서 이원조가 썼다.